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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향의 섬, 사할린 - 유기남선교사

작성자
altaimission
작성일
2015-02-16 03:21
조회
110
한 맺힌 망향의 섬, 사할린
유기남선교사
알타이선교회 대표


겨울철에 만나는 사할린의 첫 인상은 펑펑 쏟아지는 눈과 하얗게 변해버린 자연,살을에는듯한 추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쓰고있는 털모자이다. 겨울의 아침은 늦어서 8시가 지나야 겨우 근처가 어렴풋이 밝아진다. 영하 40도 정도가 되면 공기 중의 미세한 수증기가 얼어 마치 안개가 걸려있는 것처럼 된다. 낮이 돼서야 태양이 있는 방향으로 가까운 곳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후에는 대부분 쾌청한 날씨가 된다. 태양이 강하게 비취는 대낮에는 갑자기 따뜻해져 입고 있는 모피 외투가 땀에 젖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태양은 곧 힘을 잃어 서쪽으로 기울어져 버린다. 그리고는 붉은 태양은 인적이 드문 타이가(침엽수림)의 위쪽으로 떨어져간다. 나무에 붙어있는 얼음과 귀틀집의 유리창, 그리고 사람의 얼굴도 한동안 주홍 빛깔로 불타오른다. 붉은 구슬이 아래로부터 조금씩 깎여져 간다. 밤이 되면 기온이 한층 더 내려간다. 심야에 집 밖에 나가면 사각사각하는 희미한 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대기 속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얼음 결정체가 서로 달라붙어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사할린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원래는 일본의 최북단에 있는 혹카이도(北海道)와 연결된 땅이었으나 바다로 인해 갈라져 외딴섬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에서 1737년 발간된 지도에는 ‘검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의 섬’이라는 뜻으로 「사기린」으로 명명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작가 체코브는 1869년도에 사할린에서 3년간을 지내고 난 뒤 ‘슬픔의 틈새’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에게 있어서 사할린은 슬픔을 넘어 깊은 상처와 아픔으로 인해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하는 통한의 땅이요, 버려진 자가 되어 마음대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절벽위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떠나온 고향과 가족들이 그리워서 울부짖어야하는 망향의 섬이다. 곧 다가오는 설날과 같은 명절을 맞이할 때면 그 슬픔과 가슴저림은 더욱 깊어져 잠못이루는 밤이 한없이 이어지고 만다.

사할린은 타타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베리아 본토와 분리되어 있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이다. 남북의 길이는 한반도보다 조금 길고, 면적은 남한보다도 약간 넓다. 북부에는 저지평원이 자리잡고 있고, 남부에는 동사할린산맥(1,609m)과 서사할린산맥(1,354m)이 나란히 뻗어있다. 그 외에 북쪽에 있는 캄차카 반도에서 일본의  혹카이도까지 이어지는 쿠릴열도를 포함해 사할린주라고 한다. 이곳에 67만 정도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러시아인 55만명, 우크라이나인 5만명, 고려인(한인) 4만명, 백러시아인 1만 1천명, 타타르인 1만 7천명, 모르도와인 5천명, 소수의 아이누족들이 살고 있다.

사할린의 중심도시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는 약18만명의 인구가 있는데, 이중에 한인들이 약 4만명이다. 석탄이 풍부해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석탄을 연료로한 발전소와 공장의 연기가 보인다. 러시아의 다른 신흥도시들처럼 똑같은 빌딩들이 늘어서 있지만, 일본시대의 낡은 목조의 집들도 조금은 남아있다. 대로변에는 백화나무나 포플러의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철도의 동쪽이 시(市)의 중심지이다. 이곳에는 일본시대의 건축물을 개조해 만든 향토박물관과 미술관이 있다. 예전의 일본신사(紳寺)에는 돌담만이 남아있다. 시내는 하루면 걸어서 충분히 볼 수 있는데, 시장에서 한국말로 원하는 물건을 사는데에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한국동포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는 일본이 한국 식민지화를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강행되면서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고 만주로, 일본 등지로 살길을 찾아나선데서부터 시작된다. 1941년에는 약 8천여명의 한인노무자들이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세계 제2차대전 말기인 1944년 9월에 징용령을 발표한 후, 안전사고가 잦은 탄광이나, 벌목장, 토목공장 등으로 많은 한국인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소식이 알려지자 강제이주되었던 한인노무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일념으로 사할린 남쪽 끝의 꼴르사코프항구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자국민만을 태워 돌아갔으며, 한인들은 뒤에 남겨져 발이 묶이게 되었다. 그 후 눈물의 세월은 흘러 1990년 9월에 한.러수교가 이루어지기까지 이르렀다. 1992년 9월 29일에는 사할린거주 독신자 87명이 대한항공편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한적십자사의 지원으로 안산에 임대아파트 500동을 짓고 사할린 1세대 노인들 500세대인 1,000명을 영구 귀국시켰다. 그리고 부천에 100세대, 서울 목동에 100세대, 인천에 500여명을 비롯해 청원, 화성, 부산, 김포 등지에 지금까지 4,000여명이 들어와 살고 있다.

한국선교사들의 사할린지역 선교는 1990년 4월에 시작되어 유즈노사할린교회가 해방이후 첫 개신교회로서 개척되었다. 1991년 4월에는 사할린교회, 5월에 뽀로나이스크교회, 8월에 꼬르사꼬프교회, 9월에 홈스크교회, 12월에 우글레고르스크교회와 노워알렉산드롭스크교회들이 개척되었다. 그 후에 마카로브교회, 뷔코프교회, 돌린스크교회, 고르노자엘스크, 네벨리스크교회, 구원의 기쁨교회, 끄라스나고르스교회, 금광교회, 빛과 사랑의교회, 연동교회, 순복음교회, 연합감리교회, 또마리교회, 루가보에교회 등이 개척되었다. 1992년 말부터 사할린한인선교사협의회가 조직되어, 산하에 25여곳의 교회와 여러 작은 가정교회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지금은 15여명의 선교사가 교회개척과 지도자훈련, 신학교사역, 문화사역 ,러시아교회와의 협력사역 등을 진행하며 선교활동을 감당하고 있는 중이다. 일년 중 많은 시간을 눈보라와 엄청난 추위 속에서 지내는 선교사들의 가정과 사역을 주님께서 성령님의 따스함으로 지켜주시고 열매를 맺게 해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선교타임즈 2012.1


복음을 들고 열방으로..세계를 품고 주의 영광을 위해..